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문단 편집) == 평가 == > 정적들을 상대로 한 내란에서든 이민족들을 상대로 한 외국 땅에서의 전쟁에서든 누구도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18년간 제국을 통치한 뒤 어린 아들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그들에게 이전의 어떤 황제보다 큰 부와 무적의 군대를 물려주었다. > ----- > '''로마 시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 [[에드워드 기번]]이나 원로원 중심에서 황제들을 평가한 [[디오 카시우스]]에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상당히 부정적이면서도 매력 있는 악당 같은 황제로 묘사된다. 이중 기번은 세베루스를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주범" 내지 "이상적인 원수정 체제를 가혹하게 바꾼 황제"로 묘사하면서, 그가 능수능란하고 뛰어났음에도 굉장히 잔인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기번이 많이 참조한 디오의 기록이 큰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왜냐하면 디오는 세베루스가 본인과 가문의 야망을 위해 제국에 무분별하게 쾌락, 조작, 공포감을 위한 협박을 자행했는지 묘사하면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가혹하고 잔혹하게 통치한 권위적인 프린켑스"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평가에도, 동시대 디오와 헤로디아누스가 인정했듯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비열함과 잔혹성 등 인격적 부분의 문제 외에는 뛰어난 황제였다. 그는 동시대 원로원 의원 디오와는 정견이 다르고, 성향도 반대였으나 사적으로는 매우 친밀한 친구였고 매우 귀족적인 그에게서 엄격함, 절제력, 결단력, 애국심 측면과 사생활 측면에서의 검소함 측면에 있어, 디오가 경험한 여러 황제 중 가장 휼륭한 평가를 얻었다. 이는 헤로디아누스도 비슷한데, 세베루스 밑에서 황궁 관료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 헤로디아누스 역시 그가 가진 인격적 측면과 별개로, 세베루스가 가진 황제로서의 능력과 자세를 높이 평했다. 이런 동시대의 평처럼 세베루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제국의 흐트러진 법체계와 질서를 바로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후대 로마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제국 통치에 필요한 법률, 행정, 군정, 종교, 경제 지식이 풍부한 황제이자, 잔혹함과 유연한 통치술을 두루 갖춘 훌륭한 황제였다. 간단히 말해, 그는 동시대 사람, 후대 사람 모두에게 공과가 분명한 현군으로 평가받는다. 세베루스는 2세기 후반 무렵 숫자가 줄어들고 있던 전통적인 로마엘리트 출신답게,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이 대단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또래 원로원 의원들과 비교해도 그는 전통적 로마 엘리트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베루스는 즉위 후 스스로를 군인황제라고 하면서, 군대의 신임을 얻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실제 세베루스는 정치적 역량과 상황 파악 능력에서 동시대 경쟁자들과 비교해 매우 뛰어났다. 디오,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된 동시대 사람 및 후대의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의 평처럼 세베루스는 교활하면서도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가 로마 입성 후 정통성을 위해 내세운 [[페르티낙스]]가 어떤 이유 때문에 몰락했고, 왜 [[마키아벨리]], [[디오 카시우스]] 등에게 까였는지 생각하면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애 전반과 집권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베루스는 매우 기민하고 영리한, 즉 영악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섯 황제의 해 경쟁자 중 황제 참칭을 가장 먼저 했음에도, 적절한 시점에 자신이 황제가 됐음을 선포했고 과감히 로마로 군을 이끌고 간 뒤 스스로를 군인황제로 자처해 그 권위를 내세웠다. 이는 그가 원로원 의원이며, 법률가, 변호사 출신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행보인데, 세베루스는 군인황제를 자처한 원로원 출신 황제임에도 군사적인 역량이 상당했다. 군사적 측면의 평을 살펴보면, 세베루스는 제 2 파르티카 군단을 이탈리아의 알바에 주둔시켜 전략적 예비대 및 기동군 역할을 하게 했다. 이는 상당히 진보적인 군사 배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과 아이디어가 모여서 후기 로마의 황제를 따라다니며 적을 격파하는 전문 야전군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두 차례의 파르티아 원정을 성공시켜서 전략적 요충지인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속주화를 결정했다. 이런 정복 전쟁 외에도 그는 말년에 칼레도니아 원정을 추진하면서 브리타니아와 북해 연안의 치안까지 해결하고자 했고, 방어선 구축과 로마군 활용 전술 역시 유연했다. 또 정복 전쟁을 치루면서도 그는 트라야누스처럼 철저한 군사적 계획만 수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국의 국고 수입, 속주민들의 생활 문제까지 신경쓰는 등 행정가이기도 한 황제가 보여줄 치밀한 행보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세베루스는 그와 세베루스 왕조가 재평가되면서, 군사적 측면에서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유연하고 현명한 황제였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그는 로마 황제가 원수정 아래에서 얼마나 군대를 잘 장악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알았던 황제이기도 했다. 로마 황제들이 근위대 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 주둔 중인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상당한 부담감을 가져야 했던 것은 원수정의 문제점과 게르만족, 사산 왕조의 성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는 유언으로 두 아들에게 그토록 군대를 강조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장악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세베루스 가의 마지막 후계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명군이긴 했지만 근위대조차 통제하지 못했고, 군의 지지도 온전히 받지 못한 까닭에 게르마니아에서 병사들 손에 암살됐다. 여기서 고려해야 하는 건 황제의 어린 나이도 있었다. 세베루스 왕조에서 초대 황제 빼고는 어린 시기에 즉위해서 전부 20대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전에 그들과 같은 경우는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네로 뿐이었고 그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고려한다면 세베루스 왕조의 불운은 어린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네로의 경우에는 그의 시대 대부분을 근위대장으로 있던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모두 동시대인들의 기준에도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견해에 여지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반면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선황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기 동안 힘이 커진 마크로와 그 세력을 제거한 뒤, 역으로 아버지의 옛 측근이자 프라이토리아니의 입장을 대변한 [[카시우스 카이레아]], 루푸스 등이 황실관료, 일부 원로원과 공모해 암살됐기 때문에 세베루스 왕조의 어린 황제들의 실패사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능수능란하게 군을 활용해 권위를 세운 다음, 혼란한 정국을 평화롭게 만든 황제라는 업적 하나만으로도 그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 스타일은 통치계급인 원로원 계층에게 비판받았고, 현대 이전까지는 저평가되거나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된 군인황제의 시초로 평가받았다. 이유는 내전 때 알비누스를 지지하는 원로원과 척을 지게 되면서[* 자신의 적을 더 지지한다는데 사이가 좋을 수 없는게 당연했다. 알비누스 지지자들은 세베루스가 니게르와 싸우러 동방으로 간 틈에 빈집털이를 하라고 알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도미티아누스가 그랬듯이 자신의 기반인 군대에게 지지를 얻어서 통치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단의 정치 개입은 가까이는 원수정 시기, 멀리는 공화정 후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부터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까지의 공화정 후기 및 내전기 군벌, 원수정 극초기 세야누스같은 근위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네 황제의 해에서 보여준 게르마니아, 도나우 군단의 행보, 네르바 시기 근위대의 준동만 봐도 알 수 있다.] 허나 세베루스 황제의 짧지 않은 재임기간에서, 황제와 원로원 사이는 생각보다 험악하지 않았고 치세 초반 외에는 도리어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시대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두 경쟁자를 모두 제거한 직후, 그들을 지지한 그리스, 푸닉, 시리아, 레반트 일대의 권세가들을 죄다 숙청하고 제위 안정에 잠재적 위협이 될 이들을 무력화시킨 것이 컸다. 즉, 세베루스의 치세는 대개의 왕조 교체기때 원로원 구성변화처럼 황제 쪽 인사들이 들어오면서 되레 안정됐던 것이다. 따라서 세베루스 치세 초기를 제외하면, 디오나 기번의 주장과 달리 황제 정부 안에는 원로원 의원들이 다시 넘쳐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의 치세에도 원로원 계급이 고위 행정, 군사직을 독점한 것이다(물론 [[기사계급]]의 대두는 철인황제 이후로 시대적 흐름이긴 했다). 황제로서의 지위가 확고해진 후 전형적인 원수정 황제로 제국을 통치했다. 시민들을 위해서 공공사업과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특별한 축제가 있는 날이 아니면 법정에 늘 참가하여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카라칼라가 병에 걸려서 아플 때도 빠지지 않았다). 낙태 금지를 법으로 제정한 것도 세베루스 황제였다.[* 태아인권의 존중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가부장제 강화의 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냉혹한 성품과 종종 나타난 잔혹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전#s-2.2.2|내전]]에 시달리던 로마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에 벌어진 소득없는 [[마르코만니 전쟁]]과 안토니누스 역병, 콤모두스 황제의 실정, 이어진 내란으로 거덜난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켰다.[* 세금을 신설하고, 파르티아 원정으로 금은보화를 가져왔고, 내전에서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했다. 옥타비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의 행보와 상통하는 바가 많다.] 후세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세베루스를 성공한 로마 황제의 예시로 들며, 그가 주장한 짐승의 방법, 곧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교활함을 가장 잘 활용한 황제라고 평가하고 그가 앞서 말했듯 대중에게 증오를 사지 않았기에 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고 서술했다. 다만, 세베루스는 지나칠 정도로 공포심을 상대에게 심어주는 과도한 철권통치, 가혹한 보복에 기반한 통치술, 매우 비열하고 폭력적인 성격, 그리고 후계자 양성과 선정 문제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비판받고 있다. 먼저 그의 통치술은 설령 193년 내전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부터 방비가 늦은 로마 내 경제, 사회 문제 및 속주 도시들의 독립 움직임 방지를 위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 이상을 넘어설 정도로 과격하고 지나치게 잔인한 측면이 많았다. 실제로 니게르와 알비누스를 지지한 동방의 비잔티움과 서방의 루그두눔은 시민들까지 세베루스에게 적국의 포로보다 못한 처벌을 받았고 이 때문에 세베루스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또 그의 시대에 벌어진 과도한 보복조치들은 동방과 서방 속주들의 지역갈등을 넘어 일부 속주 내의 지역갈등까지 초래했다.[* 히스파니아 일대를 예로 들면 세베루스에 대한 여론과 황제의 태도로 남과 북, 동과 서에서 이런 갈등이 시작되고 그 대립이 강화되는 형태가 나타났다고 한다.] 또 세베루스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황제 본인의 뛰어난 통치술과 카리스마에 기반한 만큼, 도미나투스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전제적이었고 기본적으로 속주 내 자치와 도시 내 자치를 황제 개인이 철권통치 방식으로 통제해 어린 황제 또는 함량미달의 인물이 제위에 오를 경우 내재된 문제를 심화시킬 위험이 많았다고 지적받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후계자 문제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독단적인 인격 교육과 비열한 방법의 통치술 교육을 두 아들에게 오롯이 물려주고 이를 장려해 왕조를 단명케 했다. 세베루스는 집권 직후부터 장남, 차남에게 독단적이고 냉혹한 통치술을 손수 교육시켰고, 냉혹한 통치술로 비난 받은 선대 황제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의 방법을 10살도 안 된 장남에게 교과서로 삼게 했다. 이런 자녀 교육과 후계자 양성 방법은 세베루스의 측근들까지 걱정할 정도였는데, 마리우스 막시무스 등의 걱정처럼 세베루스의 연년생 아들들은 서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만다. 세베루스는 집권 이후 오래도록 장남 카라칼라에게만 제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어린 카라칼라에게 누구보다 혹독하게 상대를 다뤄야 함을 손수 가르쳤다. 이는 당시 원로원이 무력하면서도 권위적이고 이기적으로 일관한 상황 속에서 효율적인 제왕교육 방법이 됐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론 카라칼라와 게타 간의 분쟁을 막을 수 없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세베루스는 차남 게타를 한 단계 낮게 대우했다가 결국 둘에게 같은 제위 계승권을 인정해 교통정리까지 실패했다. 차남 게타는 무뚝뚝했으나, 인격이나 재능으론 카라칼라보다 나았고 형제가 합심하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카드였다. 하지만 세베루스의 원칙 없는 결정과 후계구도 변경 조치는, 그의 바람[* 세베루스 황제가 내전을 극복하고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건 슬로건은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율리아 돔나, 카라칼라, 게타와 같이 가족 사진처럼 나와 있는 많은 조각품을 세웠다. 물론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인 이후에 게타의 얼굴을 파버렸지만...]을 나타내는 것임에도 동복형제를 정적으로 만들고 가문을 단명케 했다. 장남 카라칼라는 게타를 살해하고, 그나마 소수였던 세베루스 가문의 방계 황족들까지 그의 손으로 모조리 멸문시켜 버렸다. 따라서 세베루스 황제가 뛰어난 황제임에도, 결론적으로 이는 그가 평가절하된 이유가 됐다. 물론, 세베루스의 이런 조치는 당시 정황상 합리적이긴 했다. 카라칼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잔혹해졌고, 성년식 전부터 세베루스 부부조차 통제가 불가능한 후계자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게타를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킨 건 게타를 보호하고 가족을 지키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하기 전까지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한 적은 있어도, 공동 통치자에게 살해당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인 전례를 생각한 그의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따라서 원수정 시기 황제 시해에 관련되어 있던 근위대, 군인들은 세베루스의 바람대로 카라칼라와 게타 두 명에게 모두 충성서약을 하였다.[* 게타 살해후 카라칼라가 제 2파르티카 군단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카라칼라와 게타 모두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면서 기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게타를 죽였음을 카라칼라가 직접 밝히고 사례금을 준다는 약속을 하자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카라칼라를 지지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고 있던 군인들에게 남은 세베루스 왕조의 남자는 미워도 카라칼라 뿐이었다.]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준 것을 비판하는 시각은 전형적인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이며 이 부분에서도 평가가 훌륭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봉급인상 이후 100년 만의 인상이었고 그 동안 조금이나마 인플레이션은 있었다. 로마군사사의 권위자인 브라이언 캠벨(Brian Campbell)은 세베루스 황제 이전에 미리 했어야 했던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세베루스의 로마군은 내전을 두 번 치뤘고 큰 해외 원정을 3번이나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그 필요성과 현실성 외에는 평가가 완전히 좋다는 것은 아니다. 2008년과 2017년 베르트 판 더 스펙으로 대표되는 현대 로마사, 셀레우코스 제국 및 헬레니즘 세계 분야의 권위자들이 발표했듯, 세베루스가 벌인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계속된 대외원정은 대부분의 세금을 내며 비용을 충당한 지중해 동부 일대의 세금 피로도를 높여, 끝내 카라칼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부채로 고스란히 돌아갔기 때문이다.[* 물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이런 점을 신경 안 쓰고 지르고 보는 타입이 아니라서, 트라야누스와 달리 통화 평가 절하 조치를 취하면서도 세금 징세 과정에서 관행으로 여겨진 여러 악폐를 적극 단속하는 노력을 하며 장기적으로 국고 피로도를 줄이려는 노력을 했다.] 또 세베루스 왕조에서 벌어진 근위대장의 전횡, 세베루스 가문과 친분을 맺은 극소수의 권세가들의 탐욕과 부정부패 역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비호 아래 벌어져 오늘날까지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세베루스 황제의 친구 플라우티아누스만 제 직위를 이용해 과거 [[세야누스]], [[마크로(근위대장)|마크로]], 라이투스 같은 악행을 벌였기 때문에, 이 부분 역시 감안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플라우티아누스 외의 세베루스 왕조의 다른 근위대장들은 문제 많았던 플라우티아누스와 달리 행정적, 법적으로 매우 뛰어났고 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마크리누스]]만 하더라도 카라칼라 암살 사건에 간접적으로 연관된 점을 빼면 위험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가 카라칼라에게 등을 돌린 것은 카라칼라가 그를 비롯한 근위대 장교들을 의심해 죄를 덮어 씌워 죽이려고 했던 점이 컸다. 하지만 세베루스 집권 이후, 2세기~3세기 원로원 내에서 벌어진 극소수의 권세가들의 행태와 플라우티아누스 등 극소수의 공신 집단의 부정부패는 세베루스의 비호 아래 벌어져, 로마 귀족들의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더 큰 문제는 외가 친척이며 사돈관계인 플라우티아누스의 몰락과 이로 인해 벌어진 카라칼라, 게타 사이의 대립 격화였다. 플라우티아누스 일가의 비극적인 몰락은 세베루스 황제 일가에게 밉보여 몰락한 모양새였는데, 이는 필요악과 같았던 이 사람의 몰락으로 세베루스가 꿈꾼 가족애와 냉철함에 기반한 세베루스 가문의 번영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손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세베루스 본인은 플라우티아누스를 마음대로 쳐내지도 못했고, 그가 몰락했을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서둘러 이를 끝내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어쨌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공존하는 현군이었다. 그가 취한 근위대장 직위의 내각총리화 개혁, 제국 각 지방에서 언제라도 벌어질 일부 지방 총독들의 월권 행위 시정 조치, 중앙 집권적인 명령 조치, 각 군대의 지위 보장 및 군대 개혁 작업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해야 할 작업들이 뒤늦게 실행됐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이 마지막 평화기를 누릴 수 있게 해줬다. 따라서 3세기의 위기에서 군대의 대두는 세베루스 황제의 정책보다는 원수정 자체의 문제점[* 실질적으로는 말 그대로 황제였지만 형식상으론 원로원에게 [[프린켑스]] 제1인자라는 명칭을 수여받은 자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로마 황제라는 직책은 [[집정관]]이나 [[독재관]]이 아닌 '''[[호민관]]'''에서 차용한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원수정제의 황권은 원로원의 권위에 비해 떨어지기가 매우 쉬웠고 이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가장 쉬운 것은 군대의 무력에 기대는 것 밖엔 없었다. 이렇게 되면 군대를 가지게 되면 누구나 황제를 자칭하기가 쉬워진다. 또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로마군의 사병화를 촉발했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는 제정이 되면서도 유효하게 적용되었다. 공화정 시대가 군벌의 사병화가 문제되었다면 4황제의 해, 콤모두스 사후 5황제 난립 시대는 유능한 장수(군단장이나 속주 총독)들의 사병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군대에 기대지 않고도 적절한 황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능력이 좋고 대외관계 상황도 좋았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나 [[트라야누스]]를 비롯한 극소수였고. 이들 못지 않은 능력치를 가져도 군인황제시대엔 내전이나 야만족 침략으로 비명횡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순수 군인 출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병사들의 손에 옹립되면서 급기야 악명높은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고 만다.[* 그래서 근현대의 로마 역사서 중 높은 평가를 받는 프리츠 하이켈하임의 '로마사'에서는 "세베루스 왕조가 그에 버금가는 황제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로마의 불운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세베루스 왕조의 일원들 중에 능력이나 업적에서 그나마 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버금갈만한 사람은 그의 남자 후손들도 아니고 셉티미우스의 처제이자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이고,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의 이모이며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알렉산데르]]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